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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ㅡ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밖에는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불만을 토해내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감았던 눈을 뜨고 밖을 가리던 커튼은 걷으니 꿈틀거리던 외부의 불빛이 들어온다. 물비린내가 코를 깨우고, 사람의 소리가 귀를 깨우고, 창밖 너머 환한 도로의 빛이 눈을 깨운다.

 

꼴랑 속옷 하나만을 입고 침대에서 기어 나와 부엌으로 걸어간다. 불과 몇 주 전만해도 30도를 넘던 날씨가 지금은 20도를 왔다 갔다 한다. 그 온도 차를 견디지 못하고 찬장에서 잔을 꺼내, 잘 보관해두었던 발렌타인을 테이블에 올려둔다. 병을 들고 달빛 아래에서 안을 보기도 하고 뚜껑을 열어 향을 맡기도 한다. 난 이거 별로 안 좋아해요. 근데 형이 좋아했잖아요. 그래서 우리 집에 잘 보관해두라면서요. 아주 신신당부를 하더니 어디 갔어요 형.

 

잔에 얼음을 넣고 술을 넣는다. 알코올 냄새가 공중으로 올라갔다 바람이 불듯 사라진다. 물비린내와 섞인 냄새가 꽤나 볼만하다. 그것들은 생각보다 잘 어울렸고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그림은 미완성작이었고, 두 가지가 문제였다. 하나는 빠져있었고, 하나는 빠져야 했다. 그런 불완전한 그림 작품.

 

 

PM 08:33

 

술잔을 비우고 옷장을 열었다. 정당한 검정색 바지에 니트 하나를 꺼내 입고는 모자까지 눌러썼다. 시간이 더 늦기 전에 나가야 한다. 형 마중 나가야지. 그는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우리 딸이, 아들이 몇 밤만 자고 일어나면 돌아올게'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항상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 몇 밤의 마지막 날 밤 죽었고 결국 그 딸이나 아들은 죽은 사람을 기다려야한다. 그 자식들은 무슨 죄가 있기에 그 사람을 한 없이 기다려야 하는가.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몇 밤만 자고 일어나면 돌아올게'라는 말은 '난 이제 죽으러 가'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꼭 드라마에서만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이다. 한 학기만 지나면 돌아오겠다는 형. 나의 생일 전날 생일 선물 갖고 돌아오겠다는 형. 그 형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한 해 동안 신고 된 실종자 수는 2만 명. 그것도 5년이 지나면 경찰들은 그 사건에서 손을 뗀다. 실질적으로 사망처리를 하는 것이다. 형이 사라진 지는 오늘로 6년이 되었다. 그는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오늘도 또 그렇게 밖으로 나간다. 혹시, 혹시라도 오늘 오는 형이 있을까 봐. 아이스크림 케이크 사 오고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는 형이 왔을까 봐.

 

"형은 나 버리지 마요."

 

거짓말쟁이 형. 형 때문에 내가 이 집에서 이사도 못 가고 있잖아. 오늘은 비도 와서 추운데 좀 빨리 와주라. 갈 때 우산 가져갔잖아. 나 지금 비 맞고 있어 어서 와서 그 우산 씌워주고 잔소리해야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고 어서.. 어서 와서 빨리.

 

생각보다 비가 많이 온다. 잠깐 지나가고 마는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당당히 말하듯 점점 빗줄기가 거세진다. 이 비 때문에 오지 못하는 것일까. 이제는 아무도 쓰지 않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끼익 끼이익 소리를 내며 그네를 탄다. 눌러쓴 모자가 다 젖어 축축하고, 스웨터는 물을 잔뜩 빨아드려 무거우며 검정색 얇은 바지는 술을 마셔 뜨거워진 몸을 직접 나서서 식히는 중이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하고 있으련지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기다린다. 생일 전날에 온다고 그랬으니까 딱 12시까지만 내일로 넘어가기 전까지만 기다려보자. 그렇게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하며 기다린다. 오지 않을 사람을

AM 12:08

 

무거운 옷들을 전부 세탁기에 넣어버리고 샤워실로 걸어갔다. 그가 걸어가는 바닥마다 발자국이 생겨 그의 미련을 말한다. 그 지저분한 미련은 제대로 닦아내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저절로 사라질 때까지 남아있다. 시간이 한없이 지내 사라졌다고 생각해도 물만이 날아 간 것이며 그 흔적은 남아있다. 물 자국이 남아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픈 상처처럼. 욕조에 뜨거운 물을 한가득 담고 몸을 그 안에 눕힌다. 물을 좋아하지도 않고 샤워시간이 긴 건 더 안 좋아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형이 말한 그 특별한 날. 그와 달리 형은 물도 좋아했고, 욕조에서 몸을 녹이는 것도 좋아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온다. 욕조의 물이 넘치는 것을 막으려면 수도꼭지를 닫아한다. 하지만 그는 그의 수도꼭지를 닫을 수 있는 사람이 언제 올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서 한 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내년에도 이렇게 기다리겠지.

 

“거짓말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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