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쏴아아아,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이상도 하지. 그녀는 한동안 꿈 없이 편안한 나날을 보내다 오늘 문득,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일찍 일어난 건가. 잠을 못 잤다는 게 더 맞겠지. 문득문득 잊을 수 없는 두려움이 일상을 쓸어버리고 덮쳐오는 날이었다. 결국 축축한 내음이 가시기 전까지 자리에 누워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녀는 이런 감각 앞에서 무력했다. 빗소리가 잦아들 무렵에야 손을 들어 오늘, 내일 휴가를 냈다. 이미 늦어버린 듯했으나 무단결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걱정이 한 아름 담긴 답신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고 다시 눈을 감는다.
꿈은, 어두워서 기억도 나지 않는 밤에 시작됐다.
아마도 눈을 뜨게 된 건 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손끝부터 퍼지는 아릿함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두려움에 떨다가 이게 꿈이라는 사실도 몰랐겠다.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이고, 식은땀 가득한 손을 눈앞으로 뻗으니 보이는 건 여기저기 긁힌 상처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손목은 아무것도 없는데 빨갛게 상흔이 남았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긁고, 또 상처를 낸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손톱에 긁힌 것이라 밴드를 붙이면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넘겼다. 익숙하니까. 깜박깜박 눈만 뜨고 있다가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꽤 오래 쓰지 않아 눌러 붙은 밴드를 보다 한숨 쉬며 붙이곤 고민하다 연인에게 오늘은 보기 힘들다는 사사로운 문자를 보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그녀는 작은 죄책감을 안고 휴대폰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겨우 한시름 놓고 늘어진 몸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용한 곳에 혼자 남게 되면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리라. 아프기도 해 뒤따라오는 고민이 평소보다 파도를 이뤄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떻게 숨길 수 있을까? 누가 봐도 손목의 날카로운 상처는 이상하지 않나? 하나가 아니라 덕지덕지 붙은 밴드를 보며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절대로, 누군가에게. 그것이 연인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고작 그녀가 용기를 내 한 행동이라고는 집 안 가득 내려앉은 무거움을 뒤로하고 엎드려, 베개에 한숨을 털어놓는 것뿐이었으니까. 오래돼서, 의식적으로 묻어두려 해서 이젠 기억도 안 나는 공포지만 두려움은 여전해 꿈으로 만나는 것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았나 싶더니 일어난 게 무색하게 다시 잠에 든다. 우습게도 다시 일어난 시각은 그녀가 늘 운동을 나가는 시간이었겠다. 불분명한 시간개념에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가 침대를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귓가를 먹먹히 채우던 물소리가 그치고 엷은 햇살만 커튼 새로 비치고 있었다. 마침 잘 됐잖아. 창문을 모두 열고 땀으로 범벅이 된 이불을 싹 치워버린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쓸쓸하고 서늘하다. 괜히 가디건을 걸친다. 손까지 싹 덮어버리는 가디건을 여미고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아프다고 휴가를 냈으니 마땅히 쉬어야 하지 않을까. 좁은 공간을 채우는 적막함을 밀어내려 틀었지만, 프로그램이 꽤 재밌어 가라앉던 기분을 씻어주었다. 더 볼까? 했지만 세탁기가 사이를 가른다. TV를 끄고 시간을 보았다. 틀기 전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부지런하게 움직일 생각을 했다. 물 먹어 무거워진 이불을 넌다. 조금 개운해진 기분이라 베란다 문턱에 옹송그리고 앉아 햇볕이나 받는다. 하품을 한다. 그리 많이 잤으면서도 졸린 모양이었다. 뒤로 휙 누워버리고는 기지개를 켰다. 따갑다. 가디건에 오래된 밴드가 쓸려 떨어졌다. 거실 바닥에 누워 바르작대다 따가운 손만 내려다보았다. 가디건을 걷어 옷에 붙어버린 밴드를 바닥에 던졌다. 또 치워야 하는데. 그녀는 소심하게 버린 것을 다시 손에 주워들었다. 오래된 밴드에 불어터진 상처가 보기 싫어 답지 않게 인상을 썼다. 조심조심 소매를 접었다. 팔의 짝이 맞지 않는 꼴을 하게 되었다. 아무렴 어때. 잠시 또 그렇게 누워 시간을 보냈다. 자꾸만 몰려오는 졸음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오늘은 온종일 늘어지는 날 인가봐. 이럴 때가 아니지. 그녀는 바짝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닫고 손에 쥔 쓰레기를 버렸다. 거실 TV 밑 서랍에서 며칠 전 샀던 밴드를 꺼냈다. 비상약이 비어 사뒀던 것이 이렇게 쓰였다. 모르던 새 앞날도 내다볼 수 있게 된 모양이지. 우스운 생각이나 하며 혼자 웃었다. 빳빳한 새 밴드는 혼자 붙이기 힘들었다. 잔뜩 인상을 쓰고 씨름하다 상처를 가렸다. 뿌듯하게 마무리하고 접었던 가디건을 다시 내렸다.
밖을 나가도 될 만큼 날이 개어 볕이 좋았다. 하지만 괜히 큰일 당하고 싶지 않으니 오늘은 참기로 한다. 일진이 사납다고 느꼈다. 그날도 그랬던 것 같았다.
......그랬나? 모르겠다. 그날도... 생각을 멈춘다. 뒤늦게 아픈 기억을 헤집어봤자 무어 좋다고. 그녀는 기억을 묻어두기를 또 택한다. 일상을 덮쳐온다면 다시 일상 밖으로 밀어내면 되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었고, 묻어내고 외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한동안 행복한 날들만 가득이었으니 이런 날도 있다고 생각하면 쉬웠다. 문득 침대에 던져두었던 휴대폰이 떠올랐다. 답장은 확인했었나? 지금껏 사뿐사뿐 걸어 다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방으로 후다닥 뛰어들었다. 이불 없는 까끌까끌한 침대에 엎드려 휴대폰을 확인했다. 방전됐네. 퍽 실망한 채로 충전기에 연결했다. 아쉬움에 눈을 떼지 못하다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단히 끼니만 때우고 곧바로 설거지도 했다. 물 떨어지는 손을 옷에 닦았다. 손자국이 난 옷을 보다가 무심하게 툭 털어버렸다. 내일 빨아야지.
별로 많은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해가 낮을 벗어나고 있었다. 앞으로 두 시간만 더 지나면 완전히 떨어져 어두워질 하늘이었다. 뜬 눈으로 보냈으니까 오늘은 일찍 자야지. 계속해서 하품했으니 저녁 시간에 잠드는 일이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그리고 내일은 사랑하는 당신을 보러 가야지. 깨끗하게 닦아둔 창문에 이마를 대었다. 빤히 바깥의 해가 지는 걸 바라본다. 하염없이. 계속. 빨갛게 흐려지는 하늘빛이 집 안 가득 쏟아졌다. 붉은 석양이 푸른빛을 띠기 시작할 때쯤, 간신히 이마를 뗐다. 혼자 있게 되면 의미 없는 행동에도 시간이 빠르게 휘발되기 마련이었다. 해가 지는 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훌쩍 어둠이 찾아왔고, 눈을 뗐을 땐 이른 밤이었다. 햇볕으로 밝히던 집은 이제 형광등 불빛 하나 없어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일찍 잘 거니까, 불은 안 켜야지. 붙박이장에서 새 이불을 꺼냈다.
포근한 새 이불을 덮고 끌어안는다. 섬유유연제 향이 물씬 풍겨 한결 편안해진 기분이 든다. 휴대폰으로 손을 뻗으려다 내려둔다. 보고 싶지만, 왠지 오늘은 혼자 정리하고 눈을 감는 게 맞다고 느낀다. 자고, 일어나면 꿈에서 벗어나 있겠지. 당신이 있는 현실이겠지. 빨리 아침이 오길 기다리며 눈을 감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