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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ㅡ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 끝을 스쳤다.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내는 생의 소리는 젖은 흙바닥에 닿는다. 생의 소리를 버거워하는 흙은 생명의 궤적을 남기며 제 몸을 패어낸다.

당신도 내게 그렇게, 닿아 떨어진 적이 있었다.

나는 당신이 내리는 생의 무게를 축복으로 받아들였던 적이 있었고, 당신은 나를 패이게 하는 것에 익숙했었다.

 

「K.」

 

빗소리에 묻혀 사라지고야 말 목소리를 흘린다.

 

젊음을 찬미하던 그 어렸던 나날들 중에는, 장마철이 싫다. 혹은 좋다. 그리 실갱이를 하는 날도 있었다. 그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창 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갯수를 세어나가던 날도 있었다. 마른 땅에 비가 떨어지듯 서로를 감사히 여기며 고요한 미소를 짓는 때도 있었다. 빗소리에 묻혀 사라질 괴성을 서로에게 지르며 저주하던 나날도 있었다. 나날이 있었다. 수많은 때가 지나갔었다. 하지만 나는 유난스럽게.

 

K. 네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당연한 날에 나는 그 빗소리에 섞여 사라지고 싶다 생각했던 나날들이 많았다.

수많은 날들이 지나갔고, 무수한 감정이 있었으며, 셀 수 없는 소리들을 들었다.

 

나는 당신이 내리는 생의 무게가 축복이라고 이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즉 당신의 생을 통해 부스러지고 있다. 빗방울이 투명하다 칭하는 이는 아직 너를 만나지 못한 것일 터였다.

무겁게도 짙은 회색. 그 자욱이 빠르게 떨어지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어쩌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색을 빗방울에 덧씌워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K. 너는 내게 그랬다.

 

너는 조각나 흩뿌려져 내 안에 들어와 박히고, 나는 이제 내가 만들어 낸 환영의 조각을 따라서 걸음을 옮긴다.

제멋대로 들어와 내 생을 뺏어가 제 생을 이지러지는 색으로 채워두고, 당신이 가지고 싶던 색을 내게서 모두 앗아갔을 터였다.

빗방울에 얽힌 수많은 소리들 중, 유독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만 남았다. 너는 그저 스쳐갔을 뿐인데, 내게 남은 것은 이러한 폐허다.

 

사라졌으면 아롱지지 말지. 흩어졌으면 찌르지 말지.

네 예상보다 약했던 사람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소리내어 울음을 터트리는 것을.

그렇게 나는 오늘도 몸을 말고 너를 견뎌내기 위하여 힘겨운 숨을 뱉어낸다.

 

*

 

k. 당신은 생의 이유를 죽지 못해서라고 했어요. 그리 말할 때마다 눈물을 그 맑았던 눈에 드리웠죠. 당신이 지을 수 있던 눈물의 수는, 당신이 내게 허락한 마음 조각의 수였을까요.

늘 당신은 내가 눈물이 없는 이라고 타박했고, 점점 더 나를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하곤 했지요.

마치 내가 눈물을 흘려야만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다는 양 말이에요.

 

k. 사랑하기에 나는 당신에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어요.

나는 자리를 벗어나 부딪히면 깨지고 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나를 둥글게 말아내었습니다.

당신의 인력이 버거워 하늘을 향해 팔을 뻗어내며, 벅찬 숨을 매 순간 내쉬어야 했어요.

그렇게 하늘 위로 한 숨 길게 내뱉는 물방울의 모양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을까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 이유를 눈물을 비추지 않는 탓이 아니라, 당신이 내는 소리에 이제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래. 그 때 드디어 울었던 것 같아요. 내가 온 몸으로 만들어낸 물자욱에 드디어 당신은 만족했을까요. 나는 그 때가 퍽 못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 나는 당신의 곁에 있는 동안 비가 오는 날이 아니라 맑은 하늘이 빛나던 나날들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고운 소리가 청명히 울려퍼지는 그 해 뜰 무렵이 아프게도 아름다운 때들을요. 늦은 오후의 햇살과 함께 저 멀리서 누군가 웃는 소리가 미쁘던 나날들을 생각했어요. 우리가 마주앉아 드리운 햇빛 너머의 얼굴에 어떠한 그림자가 지는지 숨을 죽이고 바라보던 날들. 맨 몸으로 서로를 그러안아도 춥지 않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아프도록 그립고, 그 울림들이 그립습니다.

 

쏴아아아ㅡ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눈물만치 허공에 가득한 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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