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로고.png
세모2.png
2-1.png
2-2.png

“그럼 영어 이름도 Anne이야?”

 

 

  시시하네. 제 이름을 듣자마자 그렇게 이야기를 하길래 영어 철자를 바꿨다.

  앤은 또 문득 은규의 마지막을 생각한다.

  은규는 하늘이 참 맑디맑아서, 새카만 하늘에 노란 별들이 붙박이처럼 달린, 제일 잘 보이는 아름다운 날에 갔다고 했다. 애석하게도 은규가 아주 떠나는 날엔 비가 왔다. 관은 버리고 화장을 했다. 한 줌으로 남은 뼛가루를 반은 바다에 뿌리고 반은 봉안당에 채웠다. 유품으로 남은 것이라곤 그가 흰 종이 위에 쓰던 글 몇 조각과 죽기 전 입고있던 흰 옷뿐이었다.

앤은 흰색을 싫어하게 됐다.

  은규는 단지 제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앤의 파도였다. 아니, 실재했던 파도였다.

 

 

“……언니?”

“거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언니!!”

“들어오시면 안 된, 저리 비키세요! 누가 좀 끌어내!!”

 

 

  은규가 죽은 시각은 한국 시각으로 새벽 서너 경이라 했고 첫 발견자는 건물을 관리하시는 아주머니라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앤이 은규를 제대로 마주한 때는,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남아 얼굴에 흰 천이 덮였을 때였다.

  앤은 은규를 바라볼 때 언제나 자신이 겨우 발까지만 젖은 상태라는 걸 알았다. 바다에 들어가긴 했는데 갈팡질팡하다 시기를 놓친 거다. 더 들어가기는 두렵고 나오기는 이른 것 같았다. 그런 시간이 모여 일상이 됐다. 그리고 끝은 후회였다.

  결론은 하나다. 앤은 결국 은규에게 처음도 되지 못했고 끝도 되지 못했다. 그게 그렇게나 억울하고 서글퍼서, 앤은 린다처럼 길었던 금색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덮었다. 그러고 나니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긴 흑발을 고수하던 은규와 너무 비슷해서 거기에 또 단발로 머리를 쳤다. 결국, 은규는 앤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반대는 못 되었지만.

 

 

“Enne!”

“…….”

“Enne, I’m sorry, I, (앤, 미안해, 내가,)”

 

 

  앤은 어느샌가 비를 뚫고 달려온 린다를 본다.

  그리고 린다의 축 늘어진 긴 금발을 보고 오래전의 누군가를 떠올렸다. 쓰러진 은규와 그 앞에서 울던 어린 여자아이. 열아홉에 멈춘 은규와 이젠 스물이 되어버린 그 여자아이. 저 초록색 눈과 이국적인 얼굴을 보고 어떻게 자신을 떠올릴 수 있는지, 그게 웃겨 앤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마치 그때의 은규가 제가 되고, 그때의 자신이 린다가 된 것 같았다.

  한 가지 다른 것은 린다는 왔다는 것. 모든 게 두려워서 걸음조차 떼지 못한 바보 같은 앤과는 다르게 린다는 왔다는 것.

 

 

“됐어.”

“어…?”

“됐다고.”

 

 

  네 잘못 아니야.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다. 앤은 조용히 말을 삼키고선 린다가 온몸을 다해 사수하고 있는, 품에 파묻힌 제 오래된 대본을 본다.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앤, 너는 글에 재능이 아예 없어. 환청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다 이내 흩어졌다. 그립기도 하고 그립지 않기도 했다.

  아마 린다는 그런 앤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조금 전까진 성난 사자 같다가 한순간에 순한 양이 되어 애처로운 눈빛을 하는 걸 어이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거 주인공 이름 은규 아니야.”

“…….”

“It’s Linda. (린다야.)”

 

 

  어디선가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온다.

  클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이었다.

세모3.png
안내.png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