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앤은 퍼뜩 고개를 돌려 어느샌가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노래가 멈춘 지는 오래였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앤이 앉은 테이블 위로 두툼한 책들을 내려놓는다. grammar, literature, 그리고 빼곡하게 채워진 파일 하나와 노트 여러 권. 앤은 잠시 테이블로 돌렸던 시선을 들어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다. 큰 키, 코 주위를 따라 난 약간의 주근깨, 단발로 쳐낸 앤의 흑발과는 달리, 무척이나 곱슬 거리는 금발이 가슴 아래까지 내려와 있다.
“your name is Enne, isn’t it? Quite easy to remember, I wondered why your name doesn’t start with an A. anyways I’m Linda! (네 이름이 앤 맞지? 왜 A로 시작하지 않고 E로 시작하는 이름인지 궁금했는데. 그래서 외우기 쉬웠어, 무튼 난 린다야!)”
“너 뭐야.”
차갑게 울리는 한국어에도 린다는 움찔하는 기색 없이 반색했다. 짙은 금발이 나풀거리나 싶더니 반짝이는 초록색 눈이 금세 코앞으로 다가온다. 허여멀건 두 손이 앤의 어깨를 양손으로 꼭 잡아 눌렀다.
“나도 살았어, 한국!”
“…”
“글, 썼다? 음……. 나도 씁니다, 글.”
“…”
“어제 왔어. 여기, um, 동아리? 글 쓰는 곳 갔어. 너 이름 있더라 종이에.”
문예 동아리 명단에 있는 제 이름을 보고 찾아온 것이겠거니, 앤은 조금씩 뭉개지는 린다의 발음을 들으며 대충 스스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어제 왔다고 하니 분명 자신에 대해선 잘 모를 거라고, 그렇지만 만약 로건 그 새끼와 같은 이야길 하면 너도 반쯤은 죽여놓겠다고. 앤은 테이블을 빤히 바라보며 이걸 어떤 식으로 엎어버려야 잘 엎었다는 소문이 날지 조용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신난 린다가 앞에서 뭐라 떠들어대는진 들리지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린다가 앤의 손을 붙잡고 저를 바라보게 했을 때까지는.
“……then they are dancing! (그리고 그 둘은 춤을 춰!)”
정신을 차려보면 앤은 노란색의 파(par) 두 세 개가 켜진 무대 위에 서 있다. 새파란 미디롱의 드레스, 검정 메리제인 구두.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어디선가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 앤이 당황스러움에 몇 번 무대 위를 헛걸음질하고 나면, 조명이 닿지 않는 어둠 사이로 흰색 벨라인 드레스를 입은 린다가 걸어 나온다. 그는 앤에게 손을 내밀고 얼떨결에 앤이 그 손을 잡으면, 길게 늘어트린 금발이 스텝을 밟을 때마다 함께 너울거린다. 왈츠도, 탱고도 아닌 이상한 춤이었다. 앤은 그 어둠 속에서 몇 바퀴를 돌고, 또 돌고, 린다와 손을 맞잡다가 다시 떨어지는 걸 반복하다 한순간에 느릿하게 멈춘다.
린다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다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네 글 같아.”
“…… 뭐?”
앤은 숨을 멈춘다.
“I saw the scenario and, (내가 그 대본을 봤는데,)”
“네가 뭘 봤다고?”
순간 공간이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앤은 얼굴에 드러났던 당황스러움을 지우고 냉랭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린다를 쏘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춤을 추던 공간은 마치 전구가 깨진 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둘은 여전히 비가 오는 영국의 오후, 카페테리아 창가 쪽 테이블에 서 있었고, 음악이든 드레스든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앤은 테이블 위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가, 린다가 들고왔던 파일 안에 들어있는 종이들이, 오래전 제가 쓰고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대본이었음을 알아챘다.
하, 헛웃음을 짓는 앤을 보고 린다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sorry, I just, it was just on floor and, and I couldn’t pronounce the name, so I tried to ask, maybe something like Eun Gyu, (……미안해, 난 그저, 그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어서, 그, 주인공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을 할 수가 없어서, 물어보려고, 아마 은규였던 것 같은데,)”
“네가 뭔데 내 대본을 함부로 봐?!”
앤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치곤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 남의 입으로는 또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다. 아까 그 상상 속에서 린다가 춤을 췄을 때 입고 있던 옷이 무슨 색이었더라. 아마 흰색이었을 거다. 흰색, 그래 흰색. 어쩐지. 노란색 조명과 어두운 무대, 그럼 그렇지. 이젠 좀 잊고 피하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침투한다. 앤은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하염없이 달리다 어느 순간 도로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앤은 문득 은규의 처음을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