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쏴아아아ㅡ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차가운 빗방울이 썩은 판자 위로 톡 내려앉는다. 마치 눈이 내리다가 녹아버린 듯한 온도. 첫 방울이 수신호였나. 곧바로 얼음장 같은 물세례가 퍼부어졌다. 판자 밑 짚더미 속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청년 역시 이내 아릿하게 스며드는 물기에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들어올렸다.
호흡이 탁하다. 흠뻑 젖은 짚 아래라는 사실은 제쳐놓고서라도, 수분을 머금은 공기는 녹슨 쇳냄새가 배어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무겁다. 감기 한 번 잘 걸리지 않는 건강 체질이었는데. 무엇을 했다고 이렇게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픈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머리 위를 누르던 짚들이 물기에 눌러 붙어 따라 올라왔다. 풀 결이 따끔거리기까지 해서 하나하나 손으로 떼어내는 얼굴은 짜증으로 부루퉁해 있었다.
대충 짚들을 털어버리고서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황폐한 광경에 숨을 삼킨다. 익숙한 들판이었을 터였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자연스레 다져진 공터. 바람에 나부끼던 갈대밭은 엉망으로 고개를 짓밟혀 원래의 모습을 잃고 있었다. 우리들의 아지트였던 오두막은 창문이 깨지고 대문이 박살나서 끼익끼익 스산하게 움직였다. 오두막 주변으로 흐르던 얕은 개울은 흙투성이로 더럽혀진 채, 간혹 흘러 떨어지는 붉은 액체가 뒤섞인다. 무수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사람으로 뒤덮인 대지. 어느 누구나 모르는 얼굴이 없었다.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청년은 욱신거리던 통증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현기증 탓에 비틀거렸지만, 일어서서 돌아본 광경은 귀가 아플 만큼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한 이명을 일으켰다.
“거짓, 말…….”
밤마다 이부자리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던 형이 있었다. 형의 이야기가 너무 무서워 가끔은 화장실을 못 가는 날도 있었다. 결국 이불에 지도를 그리던 날이면 나를 혼내면서도, 형의 탓을 하는 내 의견에는 다들 동조해주었다. 그런 우리를 되려 한 대씩 쥐어박으면서도 또 다시 실감나는 일화를 들려주던 형이, 지금은 복부에 칼이 꽂힌 채 바닥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흙으로 스며든 혈액은 이미 옷을 시커멓게 적시고서도 검붉게 떠올라 주변으로 번져갔다.
입술이 떨려왔다.
고함치고 싶은 것을 이를 악물어 참고 고개를 돌리면, 늘 동경하던 누나가 있었다. 화려한 검술로 남들의 시선을 휘어잡아, 스스로 미끼 역을 자처하는 일이 많았던 누나였다. 검술을 알려 달라 조르면, 괜히 동작만 크고 섬세하지 못한 기교라며 부끄러워하곤 했다. 기본기 연습이 지겨워서 누나를 찾아가면 언제나 혼자 수련하고 있어서, 자신도 그 옆에서 따라 자세를 흉내 내었다. 못 말리겠다는 듯 웃던 누나가, 사실은 노력가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렇기에 자랑스러웠던 누나는 지금 목줄기와 심장을 비롯해 무수한 화살을 온 몸에 꽂은 채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푹 꺾인 고개는 이미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려왔다.
마법을 검에 싣는 법을 알려주던 스승님은 자신이 아는 한 기사단 내에서 가장 강한 이였다. 놀기 좋아하는 어린 자신을 자주 혼쭐을 내던 엄격한 사부였다. 처음 검을 쥐었을 때는 마법 때문에 강한 줄만 알아서 자주 대들었지만, 왕궁 행사에서 선보였던 곧고 올바른 검기는 휘황하면서도 선연하고 서늘해서 사람의 마음을 두려울 정도로 앗아갔다. 힘든 수련시간을 투덜거리면서도 따라가게 되었던 스승님은, 함께 지내던 동료 둘의 몸을 지키듯이 선 채로 난도질당해 있었다. 하지만 스승님이 지키려던 두 사람의 몸 역시 깊은 상처를 입은 채 늘어져 있어, 입술 틈으로 역류한 핏줄기는 이미 굳어져 호흡을 하고 있지 않았다.
“아, 아아…….”
그것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얼굴들이었다. 난데없이 날아올라 우리를 덮친 화살 떼. 직후 이어진 습격.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난장판 틈에서, 가장 어렸던 나를 밀쳐 오두막 가장자리의 짚더미에 억지로 밀어 넣었던. 함께 싸우겠다며 저항하자 뒷목을 쳐서 억지로 기절시킨 스승님의 멀어져가는 얼굴과. 몸 위를 덮은 짚더미의 무게와 닫혀가는 시야. 스승님을 따르며 검을 뽑던 동료들의 발걸음 소리.를. 마지막으로.
무릎이 꺾인 것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