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경 쓴 발레리나는 정신없이 말했다. 너무 정신없이 말해서 무슨 말들을 했는지 까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도 중요한 말들이 있었기 때문에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교장실에서 나와 돌아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다시 거울을 통해 원래 세계로 건너왔다. 시간은 여전히 새벽이었다. 할아버지는 잠깐 심각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일이 곧 끝나겠구나.’라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 푸른 약이 뭐예요?”
할아버지가 나오는 바람에 미쳐 그 안경 발레리나에게 묻지 못했던 물음을 던졌다. 할아버지는 놀란 표정을 지으시더니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푸른 약은 거울 세계의 여왕이 만드는 특별한 약이라고 했다. 그 약을 먹으면 영생을 살 수 있음과 동시에 늙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 마법을 가지고 있는 약이기 때문에 거울 세계에서도 특별히 취급하던 것이었는데 몇 주 전, 관찰자가 그 약을 훔쳐 달아났다고 말했다. 거울 세계에서는 그 약이 없어진 걸 금방 알고 당장 수색을 시도했지만, 차원을 넘어 우리 세계로 온 바람에 더는 간섭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고자 신호가 가장 빨리 잡히는 사람에게 연락했는데 그게 바로 나였던 것이었다. 새벽마다 일어나 거울에서 마주쳤던 그 발레리나들은 나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때마다 도망치는 바람에 일이 계속 늦어진다고 말했다. 푸른 약을 먹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했다. 우선, 두 세계가 연결되어 있어야 효과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마 그 도둑은 두 세계를 잠깐이라도 연결하려고 했을 거라고 한다. 물론 그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므로 시간이 걸렸을 거라고 예상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쯤은 두 세계를 연결하기 위한 준비를 모두 끝냈을 것이라며 오늘 잡지 않으면 일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말을 마치며 조용히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 동네가 거울 세계와 가장 근접한 동네이니 분명히 이 마을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조수석에 태우고,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몇 바퀴고 마을을 돌아봤지만,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새벽 안개가 자욱했다. 미등을 키고 서행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 으슥한 골목을 돌았을 때쯤, 멀리서 푸른 빛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그 빛을 향해 다가갔고 그 빛을 쥐고 있는 사람은 늙은 노부부였다. 그 노부부는 나는 물론, 할아버지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관찰자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살았었다니. 그런 것도 놀랍지만, 저 온화하신 부부가 약을 훔쳐 달아날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할아버지는 차에서 내려 노부부에게 다가갔다. 큰소리가 나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지만, 할아버지는 푸른 약을 끝내 가져오셨고, 노부부 중 할아버지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계셨다. 아마 약을 뺏겨 슬퍼서 그런 것 같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위로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다시 차를 몰았다. 이 약을 다시 돌려놓고 오겠다고 했다. 나는 약을 돌려주는 그 순간을 보지 못했다.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긴장감이 풀려서인지, 아니면 아직 늦은 새벽이라 잠이 왔던 건지. 나는 깜빡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내 방이었다.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이불을 박차고 나가 할아버지를 찾았다. 너무 늦잠을 잔 것 아니냐는 어머니의 말씀도 무시하고 말이다. 곧장 할아버지에게 가서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거울 세계는 이제 괜찮은 것인지, 그 노부부는 어떻게 되는 건지에 대해서.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다.
“긴 꿈을 꾸었나 보구나.”
라는 말로 일축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이었다. 장난치지 말라는 내 외침에도 할아버지는 그저 웃기만 하셨다. 내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아 다른 식구들을 붙잡고 말했다. 할머니에게도 말을 했지만, 할머니 역시 “그 부부가 그랬다고?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라며 쿠키를 내 입에 넣어주기만 했다. 친구들을 만나 새벽에 있었던 모험담을 이야기해봤지만 역시 꿈이라며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또 한순간에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말해도 그건 꿈이라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 집 뒤에 있던 관찰자의 집은 풀만 무성히 자란 터만 있었다.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결국 그 이야기들을 꿈으로 결론지었다. 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도 아니었으며 허무맹랑하기만 했으니까. 어쩌면 할아버지가 배운 마법으로 모두한테 그걸 꿈이라고 말하게 해! 라는 주문을 걸지 않았을까 생각해봤지만 그쪽 역시 만만치 않게 헛소리였다. 지금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일이 기억난다. 나는 관찰자도 아니며, 거울 세계에 관한 것은 다른 작가들이 쓴 소설을 제외하고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때의 일은 모두 꿈이라는 것 마냥, 내 기억 속에만 존재했다.
비가 다시 내린다. 나는 오늘도 그 모험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