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나 사랑한단다, 레이. 오늘은 네 밤이 짧기를 바라.'
역시, 우리는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거예요. 뇌까리며 그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사내를 노려본다. 눈앞의 홀로그램은 그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만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보여주었다. 그날 당신을 따라가는 게 아니었는데. 잔뜩 독기가 서린 말에도 사내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를 마주보기만 할 뿐이다. 레이븐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당신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것도 욕심내지 말아야 했는데. 아니, 차라리 처음부터 내가 살아남아선 안 되는 거였는데. 이제 나는 정말로...
잔뜩 젖어든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그는 사내에게 달려들어 마음대로 욕하고 때리고 할퀴다 종내엔 품속에 고개를 묻고 울먹거리며 한참이나 투정을 부린다. 정말 싫어요, 테오도르. 당신 같은 거, 정말 싫어...
팔을 뻗어 사내의 몸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으며 그는 무턱대고 애원했다. 가지 마요. 그러자 사내는, 그를 마주 안아주며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귓가에 속삭여 준다. 어디에도 가지 않아, 레이. 뺨에 닿는 온기도, 몸 위에 내려앉는 무게도, 어느 것 하나 생생하지 않은 게 없었는데도.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이 한 줌 허상에 불과한 것을 사무치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에 묻어나는 다정함은 잘 벼린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사내는 꿈속에서마저 상냥했다. 그는 그 다정함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이젠 아무 의미조차 없는 주제에, 따스함을 잔뜩 품은 채 손을 뻗으면 순순히 잡혀줄 것처럼 군다. 한낱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깨어나지 못하는 그것은 형벌이었다. 차라리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면 좋겠다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간절히 빌며 레이븐은 흐느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하더라도 그는 몇 번이고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레이븐 웨스트필드가 테오도르 밀러의 손을 한순간이라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레이븐은 양손으로 제 목을 감싸 쥐고 얇은 살갗 위에 손톱을 세워 피가 나도록 긁어내렸다. 테오도르, 제발. 내가 당신에게 기대려 결심했던 걸 후회하게 만들지 마요. 살점이 뜯겨나간 자리에 피가 방울방울 고였다. 숨 막히는 고통 속에서 헐떡이며 그는 웅크려 소리 없이 오열했다.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가 맺히지조차 못하고 흘러내리기를 수없이 되풀이한다.
사랑하는 나의 레이븐, 내가 없어도 늘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그날의 밤은 그해 가장 깊었던 겨울밤보다도 훨씬 길었다. 그는 그 기나긴 밤 내내 귀퉁이가 너덜너덜해진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울었다. 허공에 대고 아무리 소리 질러 본들, 악쓰듯 뱉은 되바란 비명은 자기 자신에게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꺽꺽 울음을 뱉으며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소리를 쉼 없이 토해냈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보고 싶어요. 테오도르, 보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