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오도르. 나는 괜찮을 거예요. 당신이 그러길 바랐으니까, 분명 그럴 거예요. 내가 당신을 거스를 수 있을 리 없죠. 안 그래요?
안 돼, 레이. 제발 그러지 말렴. 울음 섞인 말이 귓가에 들린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칼을 꺼낸 그는 그저 웃었다. 닥쳐요, 당신은 내 선택에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어요. 당신은 죽었잖아요? 중얼거리며 그는 양손으로 칼자루를 거꾸로 쥐었다.
그러니까, 다 괜찮을 거예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 한가운데에 끄트머리를 대고 손에 힘을 주어 밀어 넣었다. 날붙이가 살을 벌리고 근육을 찢으며 파고드는 느낌은 섬뜩했지만, 못 참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이지, 이런 것쯤은 별 것 아니라고 또다시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잘게 떨리는 손끝을 마주 포개어 쥐고, 이를 악문 채 박아넣은 칼을 옆으로 비틀었다. 우드득, 뼈가 엇물리며 끊어지는 소리가 선연하다. 흐, 끔찍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으나 멈출 수는 없었다. 끅끅 신음하면서도 기어이 상처를 있는 대로 헤집어 놓은 그는 그제야 팔을 툭 떨군다. 박힌 칼을 뽑아낼 힘 따위는 없었지만, 피가 흐르는 속도를 보아 죽기엔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당신의 숨은 얼마나 빨리 끊어졌을까. 꿀럭꿀럭 흘러내리며 가슴팍을, 팔을 담뿍 적시는 핏물을 느끼며 그는 웃었다. 쉼 없이 액체를 토해내는 몸이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타는 듯한 고통 속에 통제를 잃고 덜덜 경련하는 몸을 뒤틀며 웃음이 되어 나오지 않는 소리로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테오도르.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 어느샌가 눈앞은 한 겹 장막이 쳐진 듯 온통 시커먼 안개뿐이었다. 비로소 발 담근 어둠 속은 시리도록 고요했다. 고여 있던 눈물이 방울져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고통 너머로 희미하게 느껴졌다. 빠르게 흐려지는 정신 속에 그는 시리도록 오랫동안 되뇌었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러 본다. 테오도르. 만약 단어가 형태를 띠었더라면 그 이름은 필시 잔뜩 빛바래 녹슨 색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제 인사할 시간이에요.
이 악물고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던 지난날들이 무색하게도,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은 우스우리만치 간단했다. 맹세컨데, 그건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쉬웠던 일임이 틀림없었다.
*
'좋은 아침, 레이. 밥은 먹었니? 내가 없더라도 식사는 꼭 챙겨야 한단다.'
말했잖아요, 당신은 매번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아요. 밥 좀 거른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는걸.
'네가 건강을 등한시할까 걱정이구나. 조금이라도 아프면 병원에 가고, 편식하지 말고.'
...그래, 알았어요. 좀 아플 때도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죽진 않았으니까 괜찮잖아요. 당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머리를 쓰다듬을 수도 있고, 끌어안고 잘 자라는 인사를 하면서 입을 맞출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죽지만 않으면 말이에요.
'잠이 안 오더라도 약을 하지는 말렴... 대신 따뜻한 코코아를 마셔 보는 건 어떠니. 뭘 하든 괜찮지만, 부디 몸 상할 일은 하지 마려무나.'
테오도르. 사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요. 내가 말한 적 있었던가요? 나에게 친절했던 사람들은 전부 얼마 못 가 죽었거든요. 어렸을 때 제 손을 잡고 음식을 쥐여주었던 아이들도 그랬고, 하다못해 당신이 아는 제 마지막 보호자조차 그랬어요. 왜 그랬을까, 나 하나만 포기하면 다른 건 아무것도 잃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들을 보면서 그렇게나 비웃었으면서. 이번만큼은 피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아니, 사실은 알고 있어요. 그냥 믿고 싶었을 뿐이에요. 내 삶이 그렇게까지 잔혹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언젠간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그러면 안 됐던 거예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전부 소용없었던 거예요... 그런 희망을 가지는 건 분에 겨운 사치라는 거겠죠. 제게도, 당신에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