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쏴아아아ㅡ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 끝을 스쳤다.
비가 오나 봐, 눈을 뜬 레이븐은 멍하니 생각했다. 간밤 가느다란 물방울이 드문드문 뺨을 스치는 것이 잠결에도 희미하게 느껴지는가 싶더니, 그것이 그새 기세를 얻어 폭우가 되었나 보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 떨어지는 물줄기를 한참이나 지켜보던 레이븐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저만치 굴러다니던 이불을 끌어당겨 그 속에 얼굴을 파묻고 요란한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자세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던 탓에 몸의 여기저기가 뻐근하게 쑤셔 왔지만, 그는 편하게 자세를 고칠 기미조차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몰골로 늘어진 몸은 꼭 정교하게 만든 밀랍인형 같았다. 아니면 생기가 모조리 빠져나가 말라 죽어 버린 시체이거나. 빗소리 사이로 들릴 듯 말듯 옅은 숨소리가 흔들거린다. 그것만이 아직 그의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였다.
그가 이 집에서 하는 일은 없었다. 원래부터 그래 왔기에 그것이 새삼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전과 다른 점은,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에 무서우리만치 무감각해졌다는 것 정도일까. 잔뜩 웅크려 누운 채로 그는 가만히 창밖만을 응시한다. 하늘의 저만치 꼭대기에 해가 뜨고,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듯 저물었다가, 또다시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길 반복하는 것을 시선 끝으로 쫓기만 한다. 몇 날 며칠이나 눈을 뜨고 있다가 어느 순간 의식을 잃고 까무룩 기절해버리는 일도 흔했다. 그런 날이 벌써 며칠, 어쩌면 몇 주일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무수히 계속되고 있었다.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느끼고 있었음에도, 도저히 몸을 움직일 기운이 들지 않았던 탓이다.
어쩐지 목이 말랐다. 레이븐은 이불 속에 감싸 안긴 채 시선을 내려 이번에는 실타래처럼 늘어진 제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뭔가를 입에 넣은 게 언제였더라. 목욕물을 받으려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말았던 건 언제였더라. 꿈 없는 밤을 보냈던 건 언제였더라... 생각을 이어가던 그는 문득 지금이 몇 시나 되었는지 궁금해졌지만, 그러면서도 굳이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머리맡의 협탁을 뒤져 약을 한 움큼 꺼내 익숙하게 입에 털어 넣었다. 서랍 속에서 나뒹굴던 주사기 몇 개가 손가락 끝에 채인다.
그는 무심결에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다 내려놓고 서랍을 닫았다. 약발이 도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몽롱한 정신 속에 그는 다시 눈을 감고 베개를 끌어안는다. 이대로 흐르는 빗물 사이로 잠겨 든다면, 언젠가는 손발 끝부터 서서히 짓물기 시작해 이윽고 한 줌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희미한 기대만이 고요함 속에 그를 달래는 전부였을 뿐이다.
하지만 미처 감상에 젖어 들기도 전에 쾅쾅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그의 정신을 깨운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한동안은 잠잠해졌나 싶더니 오래 지나지도 않아 또다시 이런 식이다. 레이븐은 작은 한숨과 함께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언제나와 같았고, 언제나처럼 내키지 않았다. 과거의 흔적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그렇게 예고조차 없이 불쑥불쑥 고개를 드밀곤 했다. 아무래도 세상은 자신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 나 있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거칠기 짝이 없는 노크와 함께 그를 재촉하던 불청객은 얼마 동안 계속 문을 두드리다가, 대꾸 하나 없는 것에 지쳐 버렸는지 이내 사라졌다. 집 안에 다시 정적이 감돌자 레이븐은 눈을 떴다. 갔나? 눈을 끔뻑거리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두르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려 무릎 위로 풀썩 떨어진다. 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몸이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한계를 호소하는 탓에, 그는 걸터앉아 벽에 등을 기댄 채 잠시 숨을 골랐다.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시야를 아래로 떨구어 무릎 위에 올라앉은 양손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한참이나 응시한 뒤에야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떨고 있었다. 왜? 자문하던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되뇌는 보람도 없이 무참히도 덜덜 떨리는 손을 꾹 힘주어 맞잡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잔떨림은 머지않아 온몸으로 번졌다. 왜?
테오도르.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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