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영원을 믿지 않아요. 믿음은 늘 저를 배신했고, 의심했기에 여지껏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냉소 어린 그 말에 사내는 조금 슬픈 얼굴을 했다. 하지만, 레이. 아무것도 기대하지 못하는 삶은 가혹하지 않겠니.
*
테오도르 밀러가 죽었다. 사고사라고 들었다. 한밤중에 울린 날카로운 착신음과, 수화기 너머로 소리치는 이의 다급한 목소리를 그는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출장이 조금 길어지겠다는 별 것 아닌 연락에 불과하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받았던 레이븐은 이어지는 말에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한 번쯤은 상대에게 무언가 되물을 수도 있었을 법한데, 어째서인지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이어지는 침묵에 인내를 잃은 목소리가 몇 번이고 대답을 재촉하는 것을 무시하고 레이븐은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한참이나 그 자리에 미동 없이 서 있던 그는, 다시금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를 뒤로한 채 떨리는 걸음을 바로 세워 침대로 돌아가 풀썩 쓰러진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양 잔뜩 웅크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꼭 외면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그는 반쯤 넋을 놓고 있었으므로, 그 뒤에 전화벨이 몇 번이나 더 울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단지 끊길 생각도 없이 계속해서 울리는 그 소리가 참을 수 없이 끔찍했다는 것 정도만이 어렴풋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중요한 연락을 받지 않는다면 곤란할 테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걸까? 남겨진 레이븐은 나약했고, 갑자기 들이닥친 악운을 맞는 것에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기에 그 이상 생각을 이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잠시, 혹은 아주 조금 더 긴 시간 동안만큼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가 되고 싶었다. 그는 귀를 찌르는 소리를 피해 이불을 뒤집어쓴 채 그 자세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만 하루를 버텼다. 귀를 틀어막았던 손을 어렵사리 뗐을 땐 이미 창밖으로 새벽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맹세컨데, 그의 삶에 그보다 길었던 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겐 다행이게도, 좀체 멎을 것 같지 않던 연락은 받아줄 이를 잃자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 뒤로 그는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냈다. 어둠 속에 잠겨 있으면 그는 잠들지 않고도 꿈을 꾸었다. 기분 나쁜 꿈이었다. 그는 그것이 시도 때도 찾아드는 형벌처럼 느껴지곤 했다. 감히 얄팍한 구원 따위를 바랐기 때문에, 욕심내어선 안 될 것을 탐냈기 때문에. 그런 날이 이어지자 그는 잠시 눈을 감는 것조차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잠들지 못하는 날은 오히려 괴롭지 않았다. 며칠 내내 뜬눈으로 어스름히 푸른 새벽빛을 응시하고 있자면, 꼭 모든 걸 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팔뚝에 가득하던 바늘 자국은 아물어 옅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안정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참으로 우습게도.
장례 준비는 순식간이었다. 힘주어 눌러 쓴 듯, 군데군데 글씨가 번진 편지 하나가 통지서를 대신해 도착했다. 보낸 이가 누구인지는 짐작 가지 않았지만, 웅크려 꼭꼭 숨어버린 그조차도 간곡히 참석을 부탁하는 그 얇은 종이 한 장만큼은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렇게나 팽개쳐 두었던 옷가지를 집어 기계적으로 팔다리를 꿰면서 그는 자신에게 수없이 되뇌었다. 알아,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도착한 레이븐이 가장 먼저 건네받은 것은 유언장이었다. 내내 품속에 넣어왔던 모양인지, 체온으로 따뜻해진 종이를 조심스레 건네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레이븐은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그가 종종 테오도르를 만나러 집에 찾아왔었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테오도르가 생전 무척이나 아꼈던 동료였다는 것도. 이건 네게 줘야만 할 것 같았노라고, 그리 말하는 낯익고도 낯선 얼굴을 레이븐은 표정 하나 없이 바라보았다.
모든 재산은 생전 테오도르가 남겨 두었던 명의로 전달되었다. 서류 위에 새겨진 이름을 확인하고, 그 옆 하얀 공백에 서명한 뒤 펜을 내려놓을 때까지도 그의 가라앉은 얼굴에는 작은 변화 한 점 없었다. 그런 동안에도 등을 찌르는 시선과 수군거리는 소리는 굳이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음에도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길에서 주워 왔다던데,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것 좀 봐요. 역시 출신 모를 아이는 들이는 게 아니라더니. 세상에, 아직 소문 못 들었어요? 쟤가 바로 예전의 그...
숨죽인 소란의 한가운데서도 굳이 그에게 다가오려 하는 이도 있었다. 대부분은 크루들이었고, 개중에는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괜찮니, 입이라도 맞춘 듯 하나같이 똑같은 질문에 그는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괜찮지 않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그 여상한 투에 대부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길 몇 번쯤 반복하자 아무도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웠으며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돌이켜 보면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으니까. 비로소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