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쏴아아아-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이른 가을에 느닷없이 시작된 장마였다. 슬슬 단풍이 들어가는 나무 사이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습기에 번들거리는 이파리는 영영 생동을 그친 듯 하였다. 아이는 그 고요를 바라보며 마루에 걸터앉아, 발목 끝까지 덮인 스커트를 연신 차올렸다. 물이 잘 스미지 않는 재질의 짙은 남색스커트. 매끈한 표면 위로 빗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원만한 사선을 따라 그것은 구르고 또 굴러 아이의 맨발 위로, 발가락 위로, 발등 위로.
코끝 스치는 물비린내가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팍 인상을 찌푸리더니 벌떡 일어나 대청마루에 섰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칼에도 습기가 눅눅했다. 어머니가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 뻔했다.
“아줌마. 수건 가져다줘.”
낭랑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비가 내린 덕에 공기 왕왕 흔들리고 있었다. 공간에 소리 스미게 잘했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금세 대답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 아이는 그것이 낯설고 또 의아해 발을 괜스레 한 번 굴렀다. 아줌마? 쏴아아아- 장마의 울음은 끝없고, 아이의 세계는 순간 침묵에 갇혔다.
“결국은 끔찍한 선택을 했다지 뭐예요.”
담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집 안으로 깊이 뻗은 복도만 노려보던 아이가 급히 몸을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대청마루와 처마, 양옆 기둥 때문에 붉은 벽돌담은 액자 속 그림 같았다. 찰박이는 발소리 두 개와 함께 목소리 두 개가 움직였다. 이런 좋은 집에서 아주 애지중지 키웠다는데 왜 그랬을까. 그렇다기엔 군대에 꽤 오래 있었다지 않아요?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모르는 일이죠. 적성에 맞았을지도. 사실 입대에도 비리가 있다고 하던데요. 아니, 정말요? 그럴 만도 하죠. 별 단 아버지에 검사 어머니잖아요. 작위적인 문장들이 습기에 둥둥 떠나가고 아이는 낱말들을 주워담는다. 가만히 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작은 머리로 고민하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붉은 벽돌담이 둘러쳐진 고즈넉한 저택들이 있는 마을에서 산다는 것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는데, 첫째는 그가 원하는 것은 언제든 말하면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또한 누구든지 서로에 대해 몰이해로 재단하는 말을 하여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붉은 벽돌담이 둘린 집에 사는 사람들은 책임을 지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이가 제 의사를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즈음 거짓을 구별하는 법을 가르쳤다. 아이는 구구절절 늘어지는 올바른 처신을 암기하다가 문득 생각하였다. 그보다는 그 이야기들을 전부 내 것으로 만드는 게 더 좋을 텐데. 누가 어떤 말을 하여도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되면 되잖아? 유모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말리며 예, 아가씨, 하고 형식적인 대답만 하였다. 아이는 그것이 퍽 영특하다는 칭찬의 다른 방식이라고 여겼다.
그러한 기억에 의지하여 아이는 몇 가지 낱말들―가령, 애지중지라든가, 군대라든가 비리라든가 하는 것들―을 곱씹었다. 그리곤 결론을 내리기 전 다시 발을 굴렀다. 쾅! 아줌마!
“어디 있는 거야? 수건 가져다 달라니까.”
발이 젖었다고. 이대로 복도를 돌아다녔다가는 불호령만으로 끝날 리 없었다. 빗소리는 그대로였다. 덕분에 공중의 습기는 아이의 볼멘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를 저 멀리 산꼭대기까지 옮길 법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어느 곳에서도 답이 없었다. 아이는 불안하게 대청 위를 서성거리다가, 결국 스커트 자락에 발바닥의 물기를 닦아냈다. 당장 빨아달라고, 아줌마를 만나면 한소리 해야지. 아이가 검은 복도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순간, 지금껏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하지 않은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음을 깨닫는다.
처마에 매달려 있어야 할 풍경이 없었다.
“… … .”
붉은 여자가 눈을 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