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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쏴아아아-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이른 가을에 느닷없이 시작된 장마였다. 놀랍게도 잠깐 사이에 꿈을 꾼 모양이었다. 기적하 발끝 시린 것 느끼고 대청에 완전히 올라와 다리를 주욱 뻗었다. 남색 스커트 대신에 검은 정장 바지. 힘없이 늘어진 다리가 흙바닥에 닿았던 건지, 발가락 사이에 모래가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다.

 

  흉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부터가 현실인지 구분하기 위하여 잠시 빗소리에 신경을 기울였다. 결국은 끔찍한 선택을 했다지 뭐예요. 이건 현실. 아줌마. 수건 가져다줘. 이건 꿈. 새까만 집안은, 아마도 반반. 흘깃 시선을 돌리면 여전히 새까맣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복도가 보였다.

 

  풍경이 달려있던 처마는 깔끔하게 도색되어 있었다. 알아챈 것은 긴긴 휴가를 시작한 작년 가을이었다. 적하는 대청 기둥에 몸을 기대고 풍경 소리를 듣는 것을 즐겼는데, 햇빛을 가리기 위하여 양산을 꺼내들고 나서야 익숙한 청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사고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날카로운 굉음에 기능을 잃은 귀를 매만지며 고개를 돌렸을 때에야, 소리가 그곳에 실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하였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그것을 떼어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배려였는지, 혹은, 더 이상 효용이 없으리라는 무관심한 판단이었는지. 다만 빈 처마를 보고 그는 또 한 번 자신의 구멍을 느꼈다.

 

  저격병의 감각은 누구보다도 날카로워야 했고, 닳아 없어져서는 안 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순간에 망설임 없이 버려질 수 있어야 했다. 적하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말을 걸었다. 너는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낼 때마다 쨍하니 들려오는 이명을 달래며 붉은 입술을 바르고, 붉은 옷을 걸치고, 붉은 책장에서 책을 챙겨 거리로 나섰다. 스스로의 시간이 비어있다는 평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그럼에도 사라진 풍경의 자리는 다짐의 목소리를 전부 무용하게 하였다. 그 맑은소리를 듣고 싶었다.

 

  겨우 복도에서 시선을 돌려 비 긋는 모양새를 본다. 붉은 벽돌담을 둘러 걸어가는 사람들의 먼 발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이전의 그였다면 분명 마지막 한 조각의 파문이 사라질 때까지도 귀를 기울일 수 있었을 터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빗소리 아래에서 지나간 것들을 곱씹는다. 끔찍한 선택을 했다, 는 말이 그렇게 가볍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무엇이 끔찍하지 않은 선택이지. 풍경의 빈자리에 존재의 공허를 느끼는 삶이라면? 가벼운 말을 빗속에 쉽게도 떨어내는 자들은 ‘일반적인’ 상식을 운운하였다. 병원 또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적하에게 일반적인 길을 제시하는 법정이 되었다. 의사는 얇은 펜촉으로 그에게 사망을 선고했으며, 사망한 저격병은 ‘새로운 삶’을 찾아가야 했다. 최종 판결문을 받은 그 날, 적하는 거울을 면하여 더 이상 사명을 논하지 못했다.

 

  쏴아아아-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이른 가을에 느닷없이 시작된 장마였다. 어디선가 풍경소리가 들렸다. 잔인한 무지함이 가볍기에 용서받는다면, 가벼운 선택 또한 비난받지 말아야 했다.

 

  붉은 여자가 일어선다. 장례식에 늦어서는 안 되었다. 축축한 모래 가득한 발로 대청을 밟는다. 새까만 복도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뒤에는 그림자도 발자국 하나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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