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쏴아아아ㅡ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 끝을 스쳤다. 서울의 밤을 빗물이 채워간다. 캄캄한 방 안. 조명이라고 할 것은 창문에 맺힌 물망울 사이로 든 가로등과 건물 불빛뿐. 이지러지고 뭉개지며 사물의 윤곽만을 간신히 비쳐주는 실낱같은 빛을 무심히 바라보던 명현, 가느다란 물부리에 담배를 끼운다. 불을 붙이고 입에 문다. 담배 연기를 타고 흘러드는 감상에 의식을 맡긴다.
방치된 유물 조각처럼 마모되어가는 기억 속 풍경들. 1761년 한양 도성 가마 안으로 스며들던 달빛, 1937년 경성 본정통 밤거리를 밝히던 흐릿한 와사등. 그리고 여기. 2018년 서울. 과거의 흔적을 찾을 길 없이 변해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변치 않은 것은 자신뿐. 죽지 못하고 살아서 흘려보내야 했던 시간의 흐름. 두 번의 죽음이 있었고, 세번째의 삶은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 아이가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을 위장해 궁 밖으로 나서던 날, 한 번 생을 다하였다. 그리고 구산의 암자에서 여승의 손에 한 번 죽어 지금의 존재로 태어나기까지.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해진다. 시야도, 감각도, 목 안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치명적인 갈증, 어둠 속에서만 살 수 있는 귀신이라 자조하는 이의 치부까지도.
또각, 또각, 명현은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감지하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심암 속에서 명료해진 청각은 벽을 뚫고 미세한 진동과 음파를 잡아낸다. 침입자? 아니- 발자국 소리로 미루어보아 여성용 구두를 착용. 규칙적인 소리에서 보폭을 유추, 대략적인 키를 계산했을 때 보통 키의 여성. 그렇다면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일 확률 매우 높음.
달칵ㅡ 문이 열린다. 한 줄기 인공광 속에서 어둠보다 짙은 불길함을 두른 그림자. 복도 너머의 심연 속에서 걸어나온 여자의 얼굴은 부처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나 붉은 입술에 걸린 미소는 마라의 것이었다. 여자의 등장에 명현,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다. 여자가 뿌린 향수가 전의 것보다 향이 배로 진했고 미묘하게 배합이 달라진 것을 감지한 탓.
"독한 향을 뿌렸군요, 문 이사."
고저차가 거의 없는, 마치 연기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는 어떤 유감도 담지 않고 덤덤하게 사실 그 자체만을 얘기한다. 문 이사- 문정희가 특유의 요염한 입꼬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비가 오니까요. 비 냄새를 지우려면 강한 향이 필요하죠."
"지우고 싶은게 비단 비 냄새뿐일까."
목마름을 일으키는 미주의 냄새. 문정희는 즉답을 피하는 대신, 빛을 등지고 선 채 클러치 백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명현에게 내민다. 명현의 흰 시스루 원피스와 대조되는 검정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선 정희. 상반된 빛과 어둠. 모호한 경계선을 아까 피웠던 담배 잔연기가 스르르 파고든다.
"이번달 옷 값. 받아둬요."
은빛 테두리가 둘러진 카드 하나. 5만원권 지폐 다발. 명현은 그것들을 받아들어 챙겼다. '공식적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게도 화폐는 필요하다. 문정희도 명현도 그 사실을 잘 알았고 동의하는 바. 표면상 명현은 청우 캐피탈 이사 문정희에게 고용된 개인 의상 제작자. 문정희는 명현에게 주거 및 의상 제작에 필요한 건물 하나를 통째로 제공했고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완벽한 차광 시설을 갖추어주기까지 했다. 물론 이런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한 달에 한 번- 때로는 그보다 조금 이르게 - 정해진 시간에 '옷 값'을 지불하는 행위야말로 계약의 가장 큰 부분.
문정희가 웃었다. 명현은 웃지 않는다. 대신 바깥에서 내리는 빗소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문정희가 한 발짝 다가섰다. 명현은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 사이로 욕망의 냄새를 맡았다. 욕심이 많아 스스로를 속물이라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는 인간. 명현의 내면은 텅 비었기에 강한 욕망으로 스스로를 불태우는 존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제 목 따위 순식간에 비틀어 죽일 수 있는 여자.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영원히 20대 초반으로 늙지도 죽지도 않는 여자. 깊은 사연 있는 눈매로 공허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양면의 얼굴. 이 흥미롭고 아름다운 존재를 제 것으로 둘 수 있다면 어떤 금전적인 대가와 위험도 감수할 수 있다. 문정희는 처음 그녀를 만난 순간, 그 빗 속에서 새하얀 드레스를 붉게 물들이며 처연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을 기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