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 마치 오늘처럼 비가 내렸지. 빗줄기 사이로 비릿하게 퍼져나가는 냄새. 그 눈동자! 껍질은 묘령일지라도 그 까만 눈에 비친 공허함은 박물관에 전시된 케케묵은 그림 속 그것이었다! 내가 제일 질색하는 것을 몸에 두르고서도 우아함과 신비로움을 잃지 않아 저도 모르게 손을 뻗게 한 그녀. 영원히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그녀. 공범자가 되어주겠다며 걸치고 있던 가디건을 던져 머리에 씌웠을 때 빗 속에서 선명히 흔들리던 눈동자. 나를 바라보는 듯 하나 실은 자신을 꿰뚫고 등 뒤의 무언가를 응시하는 그 까만 눈동자!
"'진짜 옷 값'은 지하 주차장에 있어요. 회수하고 남은건 그 자리에 두고 비상계단을 통해 나가요. 뒷처리는 언제나처럼 내 부하들이 할테니."
명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빠르게 문정희를 지나쳐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정희의 미소가 일순 씁쓸하게 바뀌었으나 명현은 외면한다. 생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흡혈귀가 줄 수 있는 것은 죽음이거나, 죽음만도 못한 삶. 어느 쪽도 욕계의 지배자가 되기 원하는 여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복도로 나서기 전.
"그 향수, 이름이 뭐죠."
"'Pioggia'."
"이양인들의 언어로군요. 뜻은."
"...비."
그것 뿐. 정녕 그것 뿐이었다. 궁금증을 해소하고 미련없이 떠난다. 문정희는 붙잡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붙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비현실적인 존재는 현실에 충실한 이의 손이 결코 닿지 않는 곳을 향하고 있다.
비가 멈출 생각도 없이 쏟아진다. 서울의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신문에서 운운하는 이상기후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내 쓸모없는 것으로 떨쳐냈다. 목이 마르다. 반복되는 갈증에 마음 한 켠이 끝도 없이 공허해지는 명현. 문정희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으나 굶주린 몸은 오로지 주차장 바닥에 조용히 잠들어있을 먹이를 향해 움직일 뿐. 응답하지 않는다. 고마워하지도, 사례하지도 않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차량 하나 없이 텅 빈 지하주차장 바닥. 모로 누운채 감긴 눈. 흐릿한 숨소리. 의식은 없음. 늘 그렇듯, 문정희는 그녀를 위해 완벽하게 손질된 먹잇감을 배달했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이곳에 있는지, 명현은 아무것도 모르며 알려들지 않았다. 인간이 짐승을 잡아먹으며 그 동물의 생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명현, 남자의 손목을 우아하게 들어올린다. 차게 식은 손가락 사이를 타고 맥박이 느껴진다. 살결 위로 번지는 온기도. 그는 명현이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명현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다. 붉게 물들어가는 홍채 사이로 짧은 탐미가 이어진 뒤.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붉은 입술이 남자의 목덜미에 살며시, 꽃잎처럼 내려앉으면 그 다음 순간.
푸욱ㅡ
순식간이었다. 살갗과 근육 아래, 동맥을 파고들어 그 안에 흐르는 붉은 생명을 집어삼키는 행위. 아마 깨어있었다면 고통에 몸부림치며 저항하느라 핏방울이 이리저리 흩날렸겠지만 반항하지 않는다면 세상 누구보다 편안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기절한 채 고통 없이 생을 끝낸다는 건 그에게 좋은 일일테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남김없이 마셔주는 것이 예의.
흡혈을 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귓가에서,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명현, 이명현. 한 번도 내 이름인 적 없었던 것처럼 낯선 단어를 자꾸 읊조린다. 여승이 합장하며 지어준 나의 두 번째 이름. 자꾸만 새어나가는 의식을 현실에 붙잡아두는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도 이제는 권태로웠다.
아, 비 냄새.
명현, 목덜미에 파묻고 있던 입술을 떼고 마침내 영원과도 같이 긴 행위를 끝낸다. 온몸의 피를 죄 빼앗긴 남자는 이제 한낱 살덩어리가 되어 쓰러진 남자를 바라보다 나직한 숨을 내뱉는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열기. 방금 전까지 숨을 쉬던 사람에게서 빼앗은 것. 살아있다는 증명.
애도하는 법을 잊은 괴물.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혀로 스윽 핥아 지운 뒤, 명현은 주차장에 희생양을 버려두고 빗 속으로 나아간다. 차가운 빗줄기가 흡혈의 후희로 달아오른 전신을 촉촉히 적신다. 환희도 포만감도 썰물처럼 간 데가 없이 지겹게도 찾아드는 씁쓸함, 그리고 고독. 서울의 공기에 비 냄새가 가득하다. 아니, 피 냄새인가?
쏟아지던 빗줄기가 거짓말처럼 거두어진다. 문정희였다. 부하가 받쳐둔 새까만 우산 아래에서 정희, 자신이 쓴 것과 같은 우산을 명현의 손에 쥐어준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하의 수트 자켓을 벗겨내 명현의 어깨에 걸쳐준다.
"차를 대기시켜 놨어요. 작업실로 돌아가죠."
무심히 고개를 모로 꺾어보인 명현, 정희가 열어준 차 문 안으로 몸을 밀어넣는다. 명현은 차 문을 닫고 썬팅이 짙게 된 유리 안에서 눈을 감는다. 명현을 태운 차가 미끄러지듯 자리를 떠난 뒤, 정희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손짓을 까딱 보낸다. -안에 있는 거 치워.
쏴아아아ㅡ 다시 세찬 빗소리만 남겨진다.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