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쏴아아아―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느리게 뜬 눈에 담긴 세상은 어두웠다. 의미 없이 몇 차례 눈꺼풀을 열고 닫는다. 검은 색채는 변하지 않았고, 회색에 잠긴 익숙한 방이 잔상처럼 시야에 새겨진다. 폭우는 마지막 조각배마저 삼켜버릴 것처럼 세상을 내리쳤고 그 호통을 그대로 받아낸 창은 비명처럼 울었다.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몸을 일으켜 앉는다. 채 닫히지 않은 틈으로 굵은 빗줄기가 들이친다. 경첩이 작게 울리고, 문이 조용히 닫힌다. 낮은 발걸음이 침대 앞을 지나쳐 덜컹이는 창문을 닫는다.
“경.”
“예, 전하.”
젖은 창틀을 바라보던 이가 다가온다. 창밖에 고정된 시선 한 켠이 검게 가려진다. 그러곤 한참 빗소리다. 되묻는 말도 없이 묵묵한 침묵을 지키던 자가 거센 바람에 덜컹이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발을 떼어 초에 불을 붙일 때까지도 조용한 방 안엔 빗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작은 불꽃이 은빛 갑옷에 일렁인다. 시선이 느껴졌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하늘은 검은 구름에 뒤덮여 빛 한 줌 새지 않았고 그 빈자리를 대신할 것처럼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검었던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하늘을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연다.
“내일의 하늘은 어떠할 것인가.”
“곧 개일 겁니다.”
비단 비를 쏟고 있는 저 하늘만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이불을 걷어 바닥에 발을 디디자 어두운 금발의 기사가 몸을 뒤로 물린다. 바닥의 냉기가 살갗을 타고 올라온다. 창문 앞에 서자 그림자가 그 뒤를 따른다.
“새로운 태양이 천지를 밝힐 것입니다.”
창문을 연다. 빗줄기가 쏟아져 들어오며 얼굴을 적신다. 느린 걸음이 뒤를 맴돌다 늑대 가죽을 어깨에 걸친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입을 굳게 다문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보이던 산맥도 빗줄기 뒤에 숨고, 푸르던 들판은 금방이라도 물에 잠길 것만 같았다. 성벽, 나무, 마을. 어두운 풍경은 마치 생활감 하나 없는 폐허처럼 보였다.
“고요하구나.”
“비가 내리고 있으니까요.”
“저들에겐 언제나와 같은 아침이겠지.”
“모두 전하의 백성입니다.”
“원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만큼 원하는 이들도 있을 테고요.”
고개를 돌려 선 이를 바라본다. 그 바람에 어깨에 걸쳐두었던 가죽이 떨어지자 조용히 주워들어 다시 몸을 감싸준다.
“전하께서는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확신할 수 있나.”
“그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나를 맹신하는 것?”
“옳은 왕을 따르는 것.”
무거운 녹색 눈을 조용히 응시한다. 한 치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는 눈.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런 눈빛이었다. 들이치는 빗줄기에 머리칼과 가죽이 젖어들자 그가 손을 뻗어 창을 닫는다. 귀를 먹먹하게 메우던 빗소리가 한순간에 잦아든다. 어깨에 걸려있던 가죽을 난로 앞에 걸어두고 반쯤 젖은 붉은 머리칼을 빗었다. 왼쪽 머리를 빼곡히 덮은 붉은 결은 오른편 귀 근처의 일그러진 살갗 위에서 멈췄다. 덤덤하게 땋아내려 묶고는 거울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라버니께서는 이 머리가 타는 불과 같다고 하셨지.”
“용서받아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날 정말로 나를 태워 없애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길 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