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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인다. 얇은 덧옷을 걸치자 곧 자신이 입은 것과 비슷한 모양의 갑주를 들고 곁에 선다. 차가운 금속이 몸을 덮는다. 난로 안의 장작이 몇 차례 튀기며 불티를 쏘고 벽에는 흐린 그림자가 서린다. 붉은 기 반사된 금속 장갑 낀 손을 한 차례 쥔다. 기사가 내민 투구를 한 팔에 들고 뒤돌아 곧게 마주선다. 무감한 낯이다.

 

“나를 그리 여기겠다면 기꺼이 저주받은 불꽃이 되어주겠다 마음먹었다.”

“옳은 수순이십니다.”

“이제 타올라 늙고 눈 먼 황제와 미친 황자를 집어삼킬 일만 남았구나.”

“썩은 부위는 잘라내야 하니까요.”

“경.”

“예, 전하.”

“정말로 나를 믿는가.”

 

얇은 턱선에 겨우 닿는 금빛 머리칼이 짧게 흔들린다. 빳빳하게 선 목이 시선 아래로 내려가고 굽혀지지 않을 것 같던 무릎이 바닥을 딛는다.

 

“나의 눈은 당신의 적을 감시하고, 나의 입은 당신의 은혜를 칭송할 것이며 나의 손은 당신을 지킬 칼만을 쥘 것입니다. 나의 신념이 곧 당신의 신념이고, 나의 믿음은 오롯이 당신을 향하니 나의 생애는 당신의 것입니다.”

 

황제를 향한 기사의 맹세다. 호화로운 장식과 겉치레도, 지켜보는 이도 없는 기사의 임명식.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그 어깨에 얹었다. 날이 시리게 빛난다.

 

“그대의 눈을 옳은 길로 인도하고, 그대의 입에 나온 맹세를 헛되이 하지 아니하며 그대의 손에 선량한 피를 묻히지 않겠다. 그대의 신념을 꺾지 않게 지키고, 그대의 믿음을 증명해낼 테니 그대의 생애를 부끄럽지 않게 하겠다.”

“폐하께 제 검을 바칩니다.”

“그대에게 내 검을 맡긴다.”

 

날이 검집에 스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시선이 오간 건 한순간이었지만 그 안에 분명한 믿음이 담겨있었음을 확신했다. 투구를 쓰고 방문을 연다. 빛 들지 않아 어둡고 긴 복도를 따라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긴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진다. 해라는 것이 존재한 적도 없던 것처럼. 아마 비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칼을 들어 구름을 갈라내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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