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산이 없었다. 가만 손으로 세차게 내리는 비를 가늠해보았다. 이 정도면 빗속에서 뛰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 가방을 머리 위로 얹었다. 속으로 수를 세다가 그대로 보도블록 위를 내달렸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가방을 스쳐서 얼굴로 부딫히는 빗방울이 시원하였다. 모든 답답한 감정을 벗어내는 기분이었다. 답답한 생각은 들지 않는 그런 평범한 날이었는데에도 말이다. 차갑기도 따갑기도 한 그 물방울들이 반가웠다. 신호등을 향해 내달렸다. 저 멀리서 붉게 화를 내던 사람은 툭,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푸른 사람이 이쪽으로 오라는 듯 나를 부르며 걷고 있었다.
그저 걷고만 있었다. 비가 머리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젖어 내려가는 소리가 구슬프게 들렸다. 검은 옷 위로 내려앉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그 축축한 방울들이 머리끝에서도 손끝에서도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추적 거리면서 내리는 그 빗방울 사이로 눈을 끔뻑였다. 장갑을 벗어 길에 떨어트린다. 한쪽에서 중심을 무너트리며 내리누르던 열쇠를 빼 들어 눌렀다. 붉은빛이 반짝였다. 차분히 문을 열었다. 열쇠를 꽂아넣었다. 따갑고 뜨거웠던 그 비를 막았다. 차창으로 부딫히는 그 물방울들을 닦아내고 밟았다. 요란하게 울리는 침이 오른쪽으로 계속 넘어갔다. 빗방울이 만들어낸 그 알 수 없는 소나타에 날카로운 건반을 끼워 넣었다.
세찬 빗소리가 내렸다.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위에서 빗발치는 그 얼음 같은 빗방울들이 제 몸에 닿아 흩어지는 것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눈을 깜빡이려고 하였다. 눈앞이 공허해진다. 검게 변하는 눈앞이 아득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눈 앞을 가리고 누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더럽혀진 그 땅 위로 붉은 꽃이 피었다. 내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나를 위로하는 것인지, 책망하는 것인지. 그저 멀어져가는 소리가 나를 배웅해줄 뿐이었다.
세찬 빗소리가 내렸다.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하늘에서 내리는 그 촉촉한 빗방울은 주변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의자에 앉아 붉어진 창을 바라보았다. 맑은 물들로 물들어 흘러내리는 그 노을을 바라보았다. 닦아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또한 예쁜 조화였다. 눈을 감았다. 그 어둠 속에서 선명히 들리는 경적 소리가 기분이 좋았다. 더는 소음을 떨쳐내고 싶지 않았다.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그 벌레들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고요는 부서졌다. 후회는 없었다.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난 그저 그 귤이 탐이 났고, 그것을 탐하였을 뿐.
이유를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잘못한 게 없다.
그는 나의 아이를 탐하였고, 나는 탐한 놈을 벌하였을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