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쏴아아아-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 끝을 스쳤다.
그 날 밤 새벽도 이렇게 비가 왔었다. 아주 어릴 때의 스쳐간 꿈이지만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꿈은 아주 기묘하고, 생생했으며 그때의 촉감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비 내리는 새벽. 나는 잠자던 도중, 눈을 떴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분명 새벽 안개의 냄새를 나는 맡았었다. 집안의 창문과 문을 모두 닫았는데도 느껴지는 새벽의 냄새.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따라가면 2층의 빈방이었다. 아무도 쓰지 않는 방임에도 문은 열려있었고 창문은 깨져있었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 따위는 듣질 못했다. 할머니가 만들어준 따뜻한 요리를 식탁 앞에서 다 같이 먹었을 때도, 이제는 혼자 잠을 잘 수 있다며 아버지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마다할 때도, 처음 맞이하는 어둠에도 의연하게 머리맡 조명을 끄고 눈을 감았을 때도 듣지 못했다. 내 귀는 이 집에서 제일 예민한 편이다. 작은 소리까지 잘 듣는 나마저 듣지 못한 것이라면 가족 중 그 누구도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새벽바람이 숭숭 불어오는 유리창을 바라보다가 그 너머로 희끄무레한 밝은 노란 빛을 보았다. 그것은 꽤 따뜻한 빛이었고, 나는 눈을 찡그려 가며 빛을 바라보았다. 눈앞이 빛으로 가득 찼을 때쯤, 나는 눈을 뜨는 중이었다. 대체 왜? 방금 전까지 나는 새벽에, 혼자 2층으로 올라가 깨진 유리창 너머로 빛을 보고 있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2층으로 달려가 다시 창문을 바라봤다. 창문은 깨진 흔적도 없이 멀끔했고 너머로 보이던 밝은 노란 빛도 보이지 않았다. 곧장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엄마! 엄마! 우리 2층 창문이 밤에 깨져있었어요."
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훔쳐내고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었으나 그곳은 여전히 휑했고, 창문도 그대로였다. 어머니는 내게 거짓말을 하는 건 옳지 않다 다그쳤다. 하지만 나는 억울하기만 했다. 내가 새벽에 일어나 새벽 냄새를 분명히 맡았고, 깨진 창문도 분명히 보았다고 강력하게 어필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나를 쓰다듬으며 꿈을 꿨겠지. 라고만 말했다. 꿈일까? 어머니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본 것은 분명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어쩌면 꿈일 수도 있다고, 내가 너무 생생한 꿈을 꾼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날 하루 역시 평범하게 흘러갔다. 아버지는 신문을 보면서 아침을 드셨고, 할아버지는 할머니더러 함께 산책을 가자고 말하고 있으며 엄마는 아직 어린 동생의 밥을 먹여주고 있고 나 또한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입안으로 욱여넣기 바빴다. 하루는 따뜻하고 평화로웠으며 기분 좋게 흘러갔다. 느른한 오후의 햇살 또한 소파에 누워있기 좋게 만들었다. 할머니가 만들어 준 파이는 달콤했고 할아버지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들은 흥미로웠다. 동생은 그날따라 얌전하게 바닥을 기어 다니기만 했다. 그렇게 하루가 끝났다.
이제 잠에 들 시간이라며 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어젯밤엔 어땠니. 혼자 잘만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어른이라고 자랑스레 허리에 손을 올렸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무슨 일이 있다면 꼭 자신을 부르라고 말했다. 괴물이 나타나는 것을 주의하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나는 이제 혼자 잘 수 있는 어른이 되었으니 괴물 따위는 한 손으로도 잡을 수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고 아버지는 이제 어엿한 영웅이 되었다며 말해주기도 했다. 짧은 이야기가 끝나고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나는 새벽에 또 눈을 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새벽 냄새가 코를 찔렀고 추운 바람이 살갗 위로 소름이 돋게 하였다. 나는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안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아무것도 없는 방. 그 방에는 여전하게 창문이 깨져있었고, 벽에는 거울이 달려있었다. 원래 있었던 건가? 의문이 들었다. 천천히 발을 내딛어 창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 날은 밝게 빛나던 노란 빛이 보이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는 익숙한 배경이 보였다. 마당의 잔디와 울타리. 그리고 우리 집 벽. 별다를 것은 보이지 않았다. 누가 들어온 흔적 또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거울로 눈을 돌렸다. 거울 속에는 내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풍경이 보였다. 그 풍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발레를 하는 여자아이들이었다. 수십 명은 돼 보이는 아이들이 푸른 잔디 위에서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다리 말고는 모든 게 정지된 듯 보였다. 여자아이들의 얼굴도, 손끝도, 바람도. 무엇 하나 움직이는 게 없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건 그네들의 얇고 긴 다리뿐이었다. 인위적인 기시감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뭔지, 가운데 있던 여자아이 하나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듯한 모습에 (여자아이가 다가오는 게 아닌 거울이 카메라처럼 다가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곧장 뒤돌아 도망쳤다. 그 방에서 나오자마자 문을 쾅 닫아버린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벽이라 그런지, 집은 여느 때보다 쓸쓸해 보였다. 이곳도 멈춘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곧장 계단을 타고 내려가 부모님이 계시는 방으로 달려갔다. 그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곳의 공기는 적어도 색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곧장 그 품으로 뛰어들어 몸을 둥글게 말았다. 두 분은 겁에 질린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고 나는 온기를 느끼고 나서야 잠에 겨우 들었던 듯싶다. 다음 날 나는 가족의 놀림거리였다. 아무리 내가 새벽에 겪은 일을 말해도 모두 또 악몽을 꾸었구나. 라는 말로 내 입을 다물게 했다. 그런 날이 일주일은 넘게 이어졌다. 나는 밤에 잠드는 게 무서웠다. 나를 유일하게 달래주시던 할아버지를 굉장히 의지했고 할아버지와 같이 자겠다고 하는 날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