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쏴아아아-.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 끝을 스쳤다. 창문 밖으로 내다본 이글 스트리트는 오늘도 여전히 마를 일이 없어 보였고, 아마 앤은 잠시 그렇게 시선을 던졌다가 신경질적으로 펜을 던져버렸을 거다. 글이 안 써져, 비가 오면 글이 안 써져,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365일 중 거진 360일을 비에 젖어 사는 이곳은 영국이라 했고, 따라서 앤의 말은 그저 비를 핑계 삼은 도피수단에 불과했으나,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학기 초, 아직 불량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로건 바커가 앤의 글을 보고 비웃으면서, 동양인들의 글은 다 이러냐는 말을 지껄였을 때, 앤이 옆에 있던 연필깎이를 냅다 잡아 로건의 머리 위로 내리쳤던 일을 다들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나보고 돈 써서 여기 들어온 거냐고 그랬었지?”
소음이 급작스럽게 떠돈다. 영국식 악센트로 뭐라 소리치는 아이들, 사람들이 일어나며 의자가 끌리는 소리, 머리를 부여잡고 우당탕 나뒹군 로건을 보고 귀를 쨀 듯 울리는 비명들. 그 모든 것들의 중심에서 오앤은 더없이 싸늘한 표정으로 쓰러진 이를 향해 쏘아붙였다. 당당한 한국말이었다. 어, 맞아. 나 돈 쓰고 들어왔어. 그래서 이렇게 깽판을 쳐도 징계 따위 안 받아. 내가 미친 것 같아? 네가 말하는 그 ‘멍청한 동양인’이 갑자기 이러니까 기분이 어때? 앤은 로건이 쓰러진 후에도 7cm짜리 펌프스 힐로 놈을 콱콱 밟아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날 후로 제대로 미친년이라는 구설이 언제나 뒤를 따라다녔으나, 타지에 와서까지 듣는 미쳤다는 말은 앤에게 그렇게 기분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이따금 그런 소리가 잦아들 때면 일부러 주위를 들쑤시며 미친 짓을 하고 다닐 때도 있었다. 행동의 이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앤, 너는 글에 재능이 아예 없어.”
“뭐? 아냐 오빠들은 내가 차세대 셰익스피어가 될 거라고 그랬는데.”
“단체로 미쳤구나.”
“아 언니!”
앤은 파도가 만들어낸 어설픈 몽상에 휩쓸리는 유리병이었다. 파도가 글을 썼기 때문에 휩쓸리듯 글을 쓰기 시작했고, 또 파도가 사라진 지금엔 휩쓸려 갈 수 없어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병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떠난 파도는 그냥 거기에 있었을 뿐이고, 어리석은 유리병이 그 움직이는 자리에 굴러들어왔을 뿐인 거다.
앤은 자신이 글을 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자신도 언젠가는 파도처럼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도망치듯 영국으로 와 예술대학에 입학했다. 문예 동아리에 들었다. 모처럼 번듯한 시나리오를 작성했고, 그 이후에는, 이후에는 그냥, 동방 구석에 처박아두었다. 닥치는 대로 글을 읽고 썼지만 그건 그저 흉내였다. 내용 없이 묘사만 가득 들어있는 글은 결국엔 무엇도 아니었다.
잔잔한 배경음으론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이 울린다. 파도가 그다지 듣지 않던 음악 중 그나마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고, 이제는 앤이 가장 싫어하게 된 노래 중 하나였다. 사랑의 슬픔, 슬픔, 슬픔…….
“En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