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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앉아 여는 신이 하는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저의 이름을 부른 게 믿기지 않는 듯 굵은 눈물 한 방울을 이불 위에 떨어뜨린 그는 볼 위에 자리 난 눈물길을 손으로 벅벅 닦아내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물었다. 몸은 어떠하느냐, 불편하지는 않느냐, 오래 누워있어 어지러울 터이니 너는 가만히 앉아있거라. 제법 큰 사람의 목소리를 내던 그는 식사를 준비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박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여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침드라마에 나왔던 평범한 별장과 비슷했다.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던 여의 눈에 메밀꽃 화병이 들어왔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현기증이 일었지만 다시 누울 정도는 아니었다. 맨 발에 닿는 공기가 시렸다. 신이 직접 화병을 꾸렸을 것을 상상하니 살풋 웃음이 나는 그였다. 순간, 화병을 구경하던 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창문 너머 드넓게 펼쳐진 메밀밭이었다. 제 뒤로 몰래 다가오는 가벼운 인기척을 알아채질 못할 정도의 절경이었다.

“나가볼래?”

샐러드가 올려져있는 트레이를 들고 신이 물었다. 토끼모양으로 깎은 사과를 바라보다 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오솔길을 걸었다. 달빛을 받은 메밀꽃들이 반짝거렸다. 사방 가득한 메밀향을 들이키며 여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교결하게 빛나는 달빛에 별들은 전부 자취를 감춘 듯 했다. 하늘의 별이 전부 땅으로 내려왔나보다. 신아. 혹여 달이 들으면 서운할까 속으로 삼킨 말이었다. 터주대감마냥 자리를 잡고 있는 커다란 달이 밉지 않는 밤이었다.

“덕화는 어때?”

“여전히 철없지. 카드 찾는 건 여전하고.”

“성북동 집은?”

“그대로지. 은탁이 방도 내 방도 그리고 끝방도.”

“아무도 없어서 쓸쓸하겠다.”

“덕화가 관리하고 있어. 그거 하면 카드 준다 그랬거든.”

여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듣는 웃음소리에 신의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한참을 걷다 여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은 걸음을 멈춘 여가 의아한 눈치였다. 여는 입술을 감춰 물었다. 여전한 얼굴이었다. 900년 전에도 몇 달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전해야 할 말이 있지만 쉬이 나오지 않았다. 먹은 것은 없지만 체라도 한 듯 명치끝이 무거웠다. 신은 커다란 눈에 자리한 슬픔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었다. 여의 붉은 입술이 찬찬히 벌어졌다.

“신아. 나 가야할 거 같아.”
여러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에서 신이 읽은 건 죄책감이었다. 이내 그 눈에선 맑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눈물길을 따라 한 방울 두 방울 서럽게 쏟아지는 눈물이 턱 끝에 맺혔다.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었다. 신이 애써 눈물을 닦아주어도 애련은 남아 여를 더욱 서글프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될까?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잖아. 배도 고플 텐데 밥이라도 먹자. 내가 상스러운 식단도 준비했어.”

빠르게 내뱉는 말끝이 작게 떨렸다. 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뿌옇게 흐린 눈이 붉어진 그의 눈을 볼 수 없어 다행이었다.

“금방 올게.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고 달려서 다음 생을 가지고 꼭 네게 다시 돌아올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의 몸이 찬찬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신이 다급하게 그를 껴안았다. 잘게 조각난 영혼조각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흩날렸다.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한 신을 다정이 가득한 손길로 달래주며 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김 신의 눈을 가린 것도 귀를 막은 것도 모두 저이니 부디 가여운 이의 업은 제가 모두 안고 갈 수 있게 해주소서. 저 멀리 메밀꽃 향기를 타고 힘차게 날갯짓을 하던 흰 나비 하나가 신의 어깨위에 내려앉았다. 쩍-하는 소리와 함께 달에 금이 갔다. 하늘이 갈라지고 숨어있던 별이 쏟아지고 메밀꽃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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