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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 세찬 빗소리와 함께 눅눅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근 세달 만의 비였다. 하늘을 뒤덮은 비구름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마침내 구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번쩍 하는 빛이 일었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축축하고 음습한 공기가 소매 끝에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덕화는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았다. 적막한 거실에는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유일했다. 삼촌이 사라졌다. 감당할 수 없는 큰 사람이니 어디 가서 굶어죽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슴 한 켠에 박힌 돌 마냥 자리했다. 여전히 길고긴 통화대기음 끝에 들려오는 건 상투적인 기계음이었다. 말끝마다 카드를 달고 살았던 그 입에선 철없는 소리 대신 한숨이 늘었다. 상념에 절은 머리가 무거웠다. 테라스 쪽에서 하얀 나비 하나가 팔랑팔랑 날갯짓을 하며 날아왔다. 비를 피해 이곳에 찾아온 여린 생명이 대견하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낮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르는 가볍고도 우아한 나비의 움직임을 시름가득한 눈동자가 좇았다.

 

-

 

드넓게 펼쳐진 메밀밭에는 지금이 9월인 마냥, 하얗고 작지만 소담한 메밀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깊게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청명한 달빛이 메밀꽃 사이로 작게 난 오솔길을 비추었다. 커다랗게 뜬 보름달을 좇아 달빛에 취한 듯 메밀내음에 취한 듯 걷다보면 그 끝에는 통나무로 만든 집 한 채가 있었다. 적게는 한 사람 많게는 두 사람 정도 무리 없이 지낼 수 있는 크기였다. 집주인의 취향인 듯 모든 것이 원목으로 이루어진 집 안에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한 남자가 있다. 눈을 닮아 시리고도 투명한 피부와 선혈보다 붉은 입술을 가진 미형의 남자는 간간히 미간을 움찔거릴 뿐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남자의 숨소리만 간간히 들리는 적막을 깨고 훤칠한 키의 남자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왼 손에는 직접 꺾은 듯 줄기부분이 마구잡이로 뜯겨나간 메밀꽃다발이 들려있었다. 그는 협탁에 놓인 빈 유리병에 메밀꽃을 담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꽃의 모양을 잡았다. 달빛이 새들어오는 창가 옆에 가져다 놓으니 퍽 봐줄만 했다. 할 일을 마친 그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투박한 손에선 다정이 묻어났다.

“여야…왕 여야…이제 일어나지 않으련….”

쓸쓸하고도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남자, 왕 여라고 불린 이는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듯 앓는 소리는 내었지만 두 눈은 여전히 꼭 감긴 채였다. 잘게 떨리는 창백한 손을 부여잡고 그는 연신 애달픈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읊조렸다. 간절하게 저를 부르는 그의 염원을 듣기라도 한 듯 손의 떨림이 점차 잦아들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던 앓는 소리도 사그라졌다. 걱정만 가득하던 그의 얼굴에 들어선 건 혹시나 하는 희망이었다. 세필로 한 올 한 올 그린 듯 가지런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내 겨우내 몸을 사리고 있다 봄을 맞이하는 꽃망울처럼 천천히 여가 눈을 떴다.

“여야!”
그의 벅찬 마음이 여를 불렀다. 정신이 들지 않는 듯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여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붙잡힌 손 한 번, 그의 얼굴 한 번 그렇게 번갈아 보던 여가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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