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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때 대선박의 최고 지휘자로 이름을 떨쳤던 이의 삶은 아침신문의 구석 조그마한 한 켠을 차지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간간한 추모의 말들과 더불어 그에게 딸려 있던 하나뿐인 양아들의 행보에 관한 근거 없는 추측은 무성한 소문을 이루었으나, 그조차도 오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시들해져 갔다. 본디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영광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가십을 원하는 법이었으니까. 이제서는 사내가 살아생전 혈육처럼 아꼈던 가까운 동료 몇 이외에는 그의 이름자조차 제대로 기억하는 이가 드물었다.

 

분명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남겨진 레이븐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풍족했다. 오히려 이전보다도 훨씬 더 여유로워진 것 같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먼 옛날 한 아이가 제 손을 붙잡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비바람이 오면 몸을 피할 곳이 있고 배가 고프면 먹을 빵이 있으니 분명 행복할 게 분명하다고. 노랗게 불이 들어온 창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분에 겨운 놈들이라 투덜거리곤 했던 그 무렵에 비하면, 지금의 그는 확실히 행복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더이상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하지 않아도 된다. 하루를 버텨낼 식량을 찾기 위해 거리를 전전하고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아도 된다. 오늘을 버티며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놀랍게도,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레이븐은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보냈다. 소파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양팔로 다리를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을 때도 있었고, 아무도 없는 서재에 앉아 묵묵히 벽난로의 온기를 쬘 때도 있었다. 일련의 모습은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포기하려는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반대로 미련 가득하게 삶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누구인지도 모를 이에게 무턱대고 화를 냈고,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으며, 어느 날은 실성한 것처럼 허공을 향해 웃음을 터뜨렸다.

 

유언장 사이에 곱게 접혀 끼워져 있었던 한 장의 편지를 그는 기어코 아직까지 놓지 못했다. 그것을 한 손에 움켜쥔 채 그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 테오도르. 그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을 노려보며 중얼거린다.

 

웃기지 마요. 이렇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구 마음대로, 난 아직 그래 줄 생각이 없어요.

 

 

 

 

 

 

그 후로는 또 얼마나 지나버린 걸까.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깜빡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테이블 위를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주사기와 주삿바늘을 응시하던 레이븐은 비척비척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찔러대는 썩은 내를 무시하고 의자를 빼내 털썩 앉았다. 식탁 위에 즐비하게 늘어놓은 채인 음식들은 차마 건드리지 못한 탓에 아직 사내가 차려두고 떠난 그대로였다- 그 위에 곰팡이가 가득 피어 흉측한 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그 접시들에 눈길을 주다가, 한쪽에 너저분히 쌓인 빵 쪼가리를 집어 한 움큼 떼어 입에 우겨넣었다. 버석거리는 것을 씹어 삼키자마자 속에서 토기가 울컥 치민다. 우욱, 넘긴 것을 모조리 게워낸 그는 비틀거리며 입가를 닦은 뒤 남은 조각을 또다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가 얼마 뒤 똑같이 뱉어낸다. 삼키고 토하고 삼키고 토하고, 멍청하게까지 보이는 짓을 몇 번이나 기계적으로 반복하던 그는 이윽고 창백하다 못해 새파래진 얼굴로 헐떡거렸다. 의미 없는 발악이라 부른들 좋았다. 속에서 무언가가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 손에 집히는 대로 들고 내던져 모조리 깨부숴버리고 싶은 기분. 하지만 그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 집안의 모든 것은 사내가 남겨두고 간 흔적이었기에.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그는 여전히 숨을 몰아쉬면서도 벽을 짚은 채 겨우겨우 걸음을 옮긴다. 스스로 요리를 한 적은 없었지만, 간간히 식사를 준비하는 사내를 옆에서 돕곤 했으니 온갖 주방기구가 어디에 박혀 있는지 정도는 훤히 알고 있었다. 개중에서 사내가 가장 자주 손질했던 것이 어떤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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